안녕하세요 오늘의 이슈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블로그 'BIN' 입니다.
오늘은 요새 한참 이슈가 되고있는
'김우중 별세'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김우중 별세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측근인 김태구(81) 전 대우자동차 회장은 10일 수원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김 전 회장 빈소에서 이같이 고인을 추모했습니다.
김 전 회장은 아주대병원에 숙환으로 11개월 간 입원하다 전날 오후 11시50분 별세했습니다. 이날 오전 10시 조문이 시작되기 전부터 옛 대우그룹 출신 인사들이 속속 빈소에 도착했습니다.
김태구 전 회장을 비롯해 장병주 전 ㈜대우 사장, 장영수·홍성부 전 대우건설 회장, 강병호·김석환 전 대우자동차 사장, 유기범 전 대우통신 사장, 추호석 전 대우중공업 사장, 신영균 전 대우조선공업 사장 등 '김우중 충신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대우그룹 해체 후 뿔뿔이 흩어졌던 '대우맨'들이 2009년 김 전 회장을 중심으로 모여 설립한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장례 절차 전반을 맡았습니다.
㈜대우의 마지막 사장이자 김 전 회장의 최측근인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은 김 전 회장이 평소 밝힌 유지와 최근의 건강 상황 등을 상세히 전했습니다.
이날 빈소를 찾은 '대우맨'들은 백발 노인부터 아직 현직에 있는 중년까지 다양했습니다. 전날 밤 부고가 전해진 후 전국에서 대우맨들이 줄지어 장례식장을 찾고 있으며, 온라인으로도 애도를 표했습니다.
페이스북에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만든 '김우중 회장님 사이버 분향실' 페이지도 "회장님이 저희 세대를 위하는 마음 덕에 직장 생활을 하고 있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첫 직장 대우에서 배운 자산으로 인생의 기반을 단단히 했다" 등 추모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빈소에 삼삼오오 모여 고인을 추모하던 대우맨들은 김 전 회장이 '후세를 위한 희생'을 강조했다고 일제히 입을 모았습니다.
김태구 전 회장은 "우리 다음 세대가 잘 살기 위해 지금 우리가 희생하자는 것이 그 양반(김 전 회장)의 생각이었다"며 "그 뜻을 이어서 세계경영연구회가 해외에서 활발하게 청년 사업가들을 양성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대우맨들은 김 전 회장이 지독한 '워커홀릭'이었다고 추억했습니다. 김 전 회장은 1990년대 해외 시장 개척을 기치로 선언한 '세계 경영'에 따라 1998년 말 현지법인 396개를 포함해 해외 네트워크 589곳에 달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회사를 키웠습니다.
당시 김 전 회장을 수행한 인사들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이 1년의 3분의 2 이상을 해외에 머물면서 밤늦게까지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일정을 소화하는 탓에 비서나 수행 직원들이 1년 이상을 못 버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대우맨들은 김 전 회장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드러냈습니다.
대우전자 사장 시절 가전을 탱크처럼 견고하게 만든다는 '탱크주의'로 전성기를 이끌었던 배순훈 글로벌경영협회장은 "김 전 회장은 우리나라 경제가 지금 이렇게까지 발전하는 동력을 제공한 분으로, IMF 때 정부와 잘 타협했으면 해체까지 안해도 됐을 것"이라며 "그 공로를 세상 사람들이 별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1984년 ㈜대우에 입사해 회사가 부도난 1999년까지 재직하다 부장으로 퇴직한 한 인사는 "다른 기업보다 자유롭고, 특히 김 전 회장이 평직원들과도 스스럼없이 직접 교류를 하며 자신감을 심어줬다"며 "김 전 회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우리에게는 좋은 분으로 기억된다. 언젠가 재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김 전 회장은 일찍부터 학연이나 지연 등이 아닌 능력과 성과로 인재를 발탁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대우맨들 중 일부는 그룹이 해체된 후에도 재계에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셀트리온[068270] 서정진 회장, 한화그룹 김현중 전 부회장, 바이오리더스[142760] 박영철 회장, 아주그룹 이태용 부회장 등이 대표적입니다.
서정진 회장은 대우그룹 컨설팅으로 김 전 회장을 만났다가 당시 34세에 대우그룹 임원으로 영입됐습니다.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하면서 실직한 이후 대우 동료들과 셀트리온 전신인 넥솔바이오텍을 설립, 셀트리온을 시가총액 20조원이 넘는 '바이오 신화' 기업으로 일궈 김 전 회장의 경영 스타일을 닮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를 중심으로 김 전 회장 주변인들은 고인의 뜻을 받들어 해외 청년 사업가 양성에 주력할 계획입니다. 대우세계경영회는 현재 회원 4천700여명, 해외 지회 37개소 규모입니다.
김우중의 삶
前 대우그룹 회장입니다. 아호는 주산(宙山)입니다.
한때 정주영, 이병철과 함께 대한민국 3대 재벌 신화 중의 하나였습니다. 현재는 거대 경제 범죄자와 망한 사업가 이미지입니다.
자본금 500만 원을 20조로 불리고 포춘지에도 대서특필된 기업가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한 성공 신화는 자그마치 21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분식회계를 통해 일궈낸 허황된 신화였고, 17조라는 어마어마한 추징금을 받았습니다.
참고로 전두환이 2013년에 납부한 추징금이 1672억 원, 전두환의 100배입니다. 내고 싶어도 못 내는 경우이기에 전두환의 추징금 환수 때 반짝하더니 이제는 관심이 없습니다. 안습인 건지 운이 좋은 건지 언플을 잘 하는 건지. 어느 날부터 베트남으로 도피했습니다.
1999년 12월, 중국 연태를 시작으로 베트남에서 3년 6개월 동안 거처로 삼다 영국을 경유해 프랑스에서 정부의 도움으로 임시 국적을 만들어 2005년까지 있었으나, 대한민국 정부와 인터폴의 압박으로 2005년에 귀국했습니다. 1989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베스트셀러를 썼는데, 지금은 세계는 넓고 도망칠 곳은 많다라는 비아냥을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제주도 출신인 아버지 우당 김용하와 어머니 전인향 슬하 5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부친이 대구사범학교(지금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장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당 김용하(1896∼1950년?)는 제주도 애월읍 하귀리 출생으로 평양제2고보를 나와 일본 호세이대학 예과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제2회)를 졸업하였습니다.
함경북도 종성중학교의 교사, 대구 사범학교 교장, 경성공립사범학교 교장, 이산공립중학교 교장, 조선 민족청년단 서울시단 이사, 서울대 상과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학생과장, 정부 중앙물자행정처 기획국장, 중앙청소비조합 전무이사, 제주도지사를 역임하였습니다. 도지사에서 물러난 후 서울로 이사했다가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납북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기고등학교 52회며 동기생으로 배우 신구,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 고건 전 국무총리,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 이준용 대림그룹 명예회장,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 등이 있습니다. 학창시절 선도부장이었으며 이종찬과는 둘 다 경기고 내에서 주먹패로 날렸다고 합니다.
이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친척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에서 바이어로 근무하다 1967년 독립해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이라는 회사를 차렸습니다. 창업 초기에는 과거 자신이 바이어 일을 하던 동남아시아의 의류 원단 및 자재 공급 관련 사업을 주로 하는 그저 그런 중소기업이었지만, 창업 이후 유창한 영어 실력과, 제2금융권으로부터 돈을 빌린 뒤 해외 회사에 오퍼를 내고, 계약이 성사되면 그 때 돈을 갚는 독특한 자금 동원 능력,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맥과 경기고 인맥 등을 잘 활용해 창업 5년만에 100만 달러 수출을 기록했습니다.
이후에는 사업 범위를 공격적으로 확장했는데, 특히 중동붐으로 엄청난 대박을 터트려서 불과 10여년만에 대한전선, 동명목재, 쌍용그룹 등 여타 쟁쟁한 기업들을 제치고 현대그룹, 삼성그룹, 럭키그룹에 이은 4대 재벌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손영길 등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1973년 윤필용 사건 때 육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다가 경기고등학교 동기생 이종찬이 중앙정보부에 근무한 덕에 큰 화를 면하였습니다.
이후 신군부의 비호를 받아 동양증권,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문(대우전자),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등을 인수하며 더욱 몸집을 불렸습니다. 특히 자동차 회사 인수 후에는 독일 만(MAN) 사와의 기술 제휴로 잔고장이 적은 MAN 엔진을 개발, 이전까지 우리나라 운수업계의 골칫거리였던 차량 정비 관련 비용을 크게 줄이는데 기여하게 됩니다.
이후 1980년대 중~후반부터는 동유럽의 민주화, 시장 개방 바람 등에 편승해 현지 진출을 위한 거점을 마련하고, 1990년대에는 세계 경영을 주창하며 구 공산권 국가에 진출해 전 세계로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대우의 수입차 생산 거점기지였던 폴란드는 지방 공무원의 관용차가 대우차 구종이었고, 수도 바르샤바에는 '세종대왕 고등학교'까지 있다고 합니다.
재벌 회장중에서는 제일 언론플레이를 잘하는 축이었고, 1989년 출간한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도 사실 언플의 일환이었습니다. 다른 언플성 책으로는 도올 김용옥이 대우측에서 모든 경비를 제공하여 김우중의 출장에 동행하고 난 후 쓴 기행문인 "대화"가 있습니다. 이 저서에서 김용옥은 상당히 김우중을 미화했는데, 당시 김우중은 다른 재벌 회장에 비하면 매우 이미지가 좋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지만, 어쨌든 IMF 이후에 밝혀진 김우중의 비리를 보면 이 책은 김용옥의 흑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룹 이미지 개선을 위한 것으로 보기에는 이 책은 거짓말 투성이였습니다. 이 책에서는 자신이 소명의식으로 기업을 하며 대우는 비생산적인 서비스업은 절대로 손 안대고, 자기는 자녀들에게 절대로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실제 김우중은 자신을 전문 경영인이라고 자처하고, 대우 사태 직후에도 2~3년 안에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없이 물러날 것을 채권단에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다른 의미로 사실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원조 샐러리맨의 신화"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시작 자체를 샐러리맨으로 시작해서 재벌 총수까지 되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고, 성장 과정에서 집안 배경, 인맥, 언플을 적극 활용하여 샐러리맨의 신화를 썼다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이 양반은 워커홀릭이였습니다.
만렙 수준의 대인관계 능력과 돈 될만한 무언가를 찾는 상업적 안목로 대재벌의 반열에 올랐지만, 김우중 회장은 기술은 사오면 된다며 자체적인 R&D를 등한시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우조선공업 기술연구소장이 기술 개발을 중시해야한다고 했으나, '기술이라는 건 필요할 때 밖에서 사오면 되는 건데 왜 쭈그려 앉아서 기술 개발이나 하냐'며 반박했습니다.
월간조선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선과 상당히 대비될 만한 의견들도 적지는 않은데, 물리학자 정근모 박사의 경우 그가 과학기술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으며, 1998년에는 김우중 회장이 직접 기술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술은 사오면 된다'라는 워딩은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임팩트 때문인지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 이후 타 대기업에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세계 경기가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우수 R&D 인력을 증원하기도 하였다. 여러모로 대비되는 대목입니다.
한편 1989년 중반부터는 상기했듯 김우중 본인도 연구 개발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전자 부문에서 브라운관용 고강성 CRT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과, 영국 워딩 기술연구소, 독일 뮌헨 연구소를 인수해 독자 플랫폼을 개발하는 등의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타 경쟁 기업들도 비슷한 시기에 경쟁력 있는 제품을 꾸준히 시연하고, 결정적으로 1997년 IMF 구제금융사태가 발생하면서 은행 차입을 통해 큰 판을 벌리는 대우의 경영 스타일은 발목을 잡게 되었습니다.
김우중 1인 독점 시스템 및 학연 중심 인사 시스템 등 '정실주의'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군정 시절부터 이어져오던 역대 정부와의 유착으로 인해 1993년 율곡비리, 1994년 전 한전 사장 뇌물수수 사건,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등에서 뇌물수수 혐의로 각각 법정에 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오히려 쌍용자동차를 추가로 인수하고 폴란드, 베트남 등지의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대우 상표의 인지도를 크게 높이는 공격적인 경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팔리지 않는 제품을 해외 법인으로 밀어내 수출 실적으로 잡고 당시 화두로 떠오른 구조조정을 소홀히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현대, 삼성에서도 부채율 감소에 힘을 기울이던 상황이었지만, 대우그룹은 일본 증권가나 외국 평가 기관의 경고가 사전에 있었음에도, 상황을 매우 낙관적으로 전망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구조조정 계획을 초과 달성한 이건 직원 입장에선 좋은 게 아닌데 삼성과 현대, 90% 이상 달성한 LG와 SK등과는 다르게, 대우는 18.5%에 그쳤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대우가 청산 회사를 세우고 나서도 한동안 기업 청산을 못한 데에는, 상기한 팔리지 않는 제품들과 정부에서 빚으로 본 사업 건들이 뒤늦게 빛을 봐 그것들의 흑자가 청산법인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등 장기적인 성과가 있었던 덕분이라고 합니다. 일례로 2001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레간자와 라노스가 합리적인 가격대와 성능을 갖춘 차량으로 선정되기도 하였고 한때 북미 고객만족도 평가 부문에서 현대ᆞ기아를 제치고 BMW의 뒤를 이어 4위를 차지한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잠재력 좋은 학생도 중요한 시험대(위기)를 통과-극복해야 비로소 세간의 인정을 받는 법인데, 몸집불리기에 성공하며 LG그룹과 삼성그룹까지 앞선 2위 재벌이 된 대우의 내실은 부실해졌고, 결국 1999년 8월 26일, 어음 만기 사태를 이기지 못하고 대우그룹이 워크아웃을 신청했습니다. 공을 들이던 대우자동차 또한 부도 이후 2000년에 북미와 유럽에서 최대 실적을 거두며 좋은 수익을 거두었음에도 결국 2002년에 청산되었습니다.
동유럽을 비롯한 제 3세계시장은 소련 붕괴 직전~직후부터 개척에 들어가 2010년대에도 현지 주민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며 호감을 산 대우를 그리워하는 시장 반응이 있었을 만큼 그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중국에서는 절경으로 알려진 구이린(桂林) 지역에 대규모 호텔을 건립하는 한편, 탁월한 접근력 및 홍보 능력으로 현지의 관민(官民)들과 원활한 관계를 형성했지만, 모기업인 대우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특히 대우자동차의 경우는 GM의 브랜드 일원화 방침으로 대우 브랜드의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룹 해체 이후 분식회계를 통한 사기 대출 혐의로 수사가 진행되면서 베트남으로 장기 도피하였다가 2005년 귀국했는데 이 때 공항에 나온 노동자들과 대우 피해자들이 몰려와서 그를 손가락질하거나 비난하였습니다. 한때 노동계와 시민단체 등로부터 해외 도피자 명의로 공개수배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2006년 징역 8년 6개월, 벌금 1000만 원, 추징금 17조 9253억 원의 형을 구형받았고 2007년 말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로 사면되었습니다. 참고로 추징금이 전두환의 100배 가까이 됩니다. 물론 사면은 사면이고, 추징금은 내야 합니다. 전두환의 추징금이 화제가 된 2013년에는 김우중 추징금을 어떻게 받아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전두환은 재산이 있는 것이 너무도 뻔했기에 추징금 환수가 금방 이루어졌지만, 김우중은 17조 원이 도무지 털어도 나오지 않을 돈임이 뻔해서인지 금방 묻혔습니다. 현재는 별세로 인해서 사실상 추징받기는 글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2000년 10월호 <월간중앙>에서 김 전 회장의 프랑스 니스 은둔사실이 특종 보도되었고, 현재도 김우중 개인의 세금 체납액이 상당하다고 합니다. 아들이 유령 회사를 통해 600억원대 해외 골프장을 소유하고 있다는 기사도 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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